![]() |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
아름다운 처녀 메두사—아름답기에 신의 사랑을 받은 처녀,
신의 사랑을 받은 탓에 저주받은 처녀.
누구나 메두사를 마음속에 품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절대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진실이 꼭 불행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린타로는 역 안에서 전화번호부가 놓인 공중전화를 찾았다.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이라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를 찾아내기까지 무척이나 고생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속도로 거리에서 철거된다면, 문화재보호법 대상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p.234
중심 내용과 아무 상관도 없는 부분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글의 분위기를 전하기는 딱 좋은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주제는 무겁지만, 문장이 유쾌합니다. 읽다 보면 책의 두께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진도가 나가죠.
추리소설가이자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는 우연히 저명한 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의 죽음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사쿠는 한없이 자연사에 가까운 죽음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죽기 직전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에 있었죠. 장례식으로 바쁜 와중에 마지막 작품, 이사쿠의 아름다운 외동딸, 에치카의 나신 조각상의 머리 부분을 누군가 댕강 잘라가 버린 겁니다.
누가 ‘머리를 잘랐는지’, 왜 ‘잘랐는지’, ‘잘린 머리’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후 조각상의 모델이 된 에치카가 실종되고 16년 전 사건이 얽히면서… 이러저러한 자세한 내용은 직접 확인하시고.(후후)
재미보다 트릭보다 제가 놀란 것은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노리즈키 린타로의 장편소설이란 점이었습니다. 요즘 일본추리소설 팬이라면 너도나도 ‘신본격!’을 외치지만 사실상 신본격의 기수라 불리는 작가의 작품은 매우 느릿느릿 들어오고 있어요. 본격이 일반 독자에게 여전히 자리 잡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일반 독자에게는 여전히 본격이 낯선 가운데, 일본추리소설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 광고 문구에는 ‘본격’이란 말을 엄청나게 어필하는 게 또 아이러니입니다. 다행이랄지, 근래 들어 이름만 무성하던 작가의 작품이 열심히 나와 주는 걸 보면, 이제 다들 말만 ‘본격 본격’이 아니라, 정말 본격을 원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시 유스케 : 결코 다른 미스터리를 비판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본격 미스터리는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전부라는 이미지가 있었죠. 그렇지만 잘 만들어진 본격 미스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트릭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어도 무척이나 세밀한 복선을 즐길 수 있더군요.
-p.538(노리즈키 린타로 인터뷰 by 기시 유스케)
소설 뒤에 작가와 기시 유스케의 대담을 실은 것은 탁월했습니다. 저는 특히 기시 유스케의 이 말이 인상 깊은데, 사실 저도 예전에는 그놈의 ‘본격’이 도통 좋아지질 않았습니다.
본격은 여운이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지요. 솔직히 저처럼 트릭이 얼마나 정교한지, 범인이 얼마나 천재적인지, 심지어 범인이 누구인지조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본격은 큰 매력이 없어요. 누가 범인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렇게 놀라지도 않는 인간이니까요.(그러면서 무척 사소한 일에 패닉에 빠질 정도로 경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게요게, 읽다 보니 매력이 새록새록 보이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일단 인물들 하나하나가 매력적이고요.
특히 이 소설의 탐정, 명탐정이라기는 미묘하게 무능한 린타로 군.
헛다리를 한 번 두 번 마구 짚더니, 잔챙이 악당의 연기에 껌뻑 속기도 하고, 결국 아버지 노리즈키 경시에게 혼나는 못난 아들. 이건 뭐야, 눈썰미는 좋지만, 탐정이 아니라 그냥 오지랖이 좀 넓은 것뿐이잖아, 라는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 주인공의 좌충우돌 행태가, 매우 귀엽습니다.
등장인물이 다 죽도록 팔 꼬고 있다가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탐정보다 훨씬 인간적이고요.
노리즈키 린타로 : 사람들 사이에 오해가 발생하는 과정을, 깜빡하고 내릴 역을 지나치는 감각처럼 써보고 싶었습니다.
-p.541(노리즈키 린타로 인터뷰 by 기시 유스케)
아하, 그렇군요. ‘사람들 사이의 오해’에서 ‘사람들’은 독자를 포함한 사람들일까요? 벅적벅적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독자도 오해에 한몫하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입니다. 치열하게 범인이 누군가를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속아보는 건 어떠신가요?
헛다리 짚는 우리의 탐정과 함께 독자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없이 돌다보니 뜻밖의 진실을 씁쓸한 뒷맛과 함께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작품 안에 조각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굳이 가독성을 방해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퍼즐이 되죠. 물론 원서로 읽었다면 머리를 감싸 쥐었겠습니다마는. 작가의 치밀한, 주인공의 조금은 엉성한 인간미…하지만 무엇보다 이 이야기에서 전율을 느낀 요소는, 추리를 떠나서 매우 훌륭한 가족 애증극이라는 사실이지요! 메두사라는 소재만으로 저는 충분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150% 충전한 듯한 떨림을 맛보았습니다. 본격 추리로서의 훌륭함은 물론이지만, 그 이전에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란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추리소설, 본격, 이런 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이걸 계기로 노리즈키 린타로 작품이 밀물처럼 쏟아지기를 바라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