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 년의 침묵 - ![]() 이선영 지음/김영사 |
현자 피타고라스와 절대적인 신성 지역인 현자의 학파.
올곧고 우직했던 현자의 수제자 디오도로스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비밀의 수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하리라' 라는 책 표지의 문구며,
제목 <천 년의 침묵>이 가리키는 '피타고라스의 정의'에 대한 진실을 파헤친다는 부분에서
<다빈치 코드>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근질근질함이 느껴집니다.
이런 광고가 분명히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겠지만 이것때문에 꺼리는 분도 생기겠지요.
저도 사실 후자의 입장이었습니다만, 일단 손에 들으니 참 잘 읽히더군요.
오호, 역시 책은 뭐니뭐니해도 잘 읽히는 게 우선입니다.
수학을 소재로 했다는 것 때문에 상당히 차가운 소설일 것 같다는 느낌이었고,
초반부는 확실히 그러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저는 굉장히 끈적끈적하게 읽었습니다. 아니, 이상하다는 말이 아니고요.
버석버석 메마르지 않고 적당히 수분을 함유했다는 말입니다.
수학적인 이야기가 주르륵 나오다가
─다행히 머리를 쥐어뜯을 이야기는 아니고,
오히려 지금 우리는 아주 기초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인데,
이런 부분이 소설의 매력을 더합니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을(사실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되는지도 모르지만)
신성하게 여기고 환희하고 의심하고 연구하는 모습이
소설의 배경 속으로 독자를 빨려들어가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현듯 아네모네 타령에, 이게 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분명히 사랑이 이 소설의 또 다른 테마이고, 저는 오히려 수의 비밀을 찾는 숨막히는 전개보다
그 물밑에 흐르는 갖가지 아름답거나 추악한 애정의 행태가 더 신경 쓰였습니다.
'아네모네'라는 말로 경고했듯이 어느 연인도 행복한 길을 걷지는 못하지만요.
사내들은 많은 것을 위해 살고 또 죽는다. 명예, 권력, 더 높은 지혜와 지식…… 그 같은 이름을 붙여 자신의 존재를 높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눈앞의 이 여인은 오직 사랑만을 좇고 있다.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미안한 줄도 모른 채 또 한 사람을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p.223
현자의 정숙한 아내이자 두 제자의 연인인 테아노의 데일 듯한 사랑이며
사랑의 궁극은 물이지요, 물!
(중략)
"무릇 남녀 간의 사랑이란 물처럼 만난 후 흘러가 넓은 대양에 이르는 것이겠지. 그러나 너와 나의 사랑은 불이니라. 뜨거움으로 화르르 타올라 종국에는 재와 연기밖에 남지 않는 것이지." -p.248
제 손을 피로 물들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잔인하고 순수한 에우니케의 사랑이며
사랑보다 욕망으로 가득했던 코레의 사랑이며
조용하고 영민하지만 업보로 가득했던 다모의 사랑이 책 안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 이야기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아, 참으로 애욕적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이렇게 읽는 사람이 저 말고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읽든 저렇게 읽든 재미있게 책을 읽고, 재미있는 책을 써 준 작가에게 감사할 줄 알면 되는 거라고 (제멋대로) 믿습니다.
살인사건의 배후는 일단 책 소개만 봐도 누구인지 자명하고,
선과 악이 제법 또렷하게 나뉘어져 있지만, 개인적으로 밉게 느껴지는 사람은 없더군요.
그림자가 엄청나게 희미했던(이게 이 사람의 속성인 듯;) 카리톤 같은 인물도 꽤 좋아합니다. 실제로 있다면 절대 친구하고 싶지 않지만요.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많은 등장인물이 나왔는데 책은 너무 짧네요. 금방 읽혀서 좋았지만요.
좀 더 인물들의 갈등이나 정욕이나 슬픔이나 욕망 같은 게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면
'천 년의 침묵'이 가진 의미도 더 무거워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과하지 않았지만, 부족한 부분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 부족한 부분을 하나하나 채워나갈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