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금을 안고 튀어라 - ![]()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권일영 옮김/노블마인 |
잠에서 깨어나면 세계는 점점 어두워지고,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 p.276
제가 연애물 알러지란 건 다 거짓말입니다. 저는 연애물 밖에 안 보고, 연애물 밖에 안 좋아하는, 이를테면 '연애 인간'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카무라 가오루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정확히는 20세기의 다카무라 가오루라고 해야 할까요.
중학생 때 한 선생님이 제게 너무 많은 책은 읽지 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책은 어느 한 연령이 된 후 읽어야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다고 말이죠. 그건 정말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연령대에 읽어서 맞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대로 작가에게도 그 연령대에 쓸 수 있는 감성이 있다고 할까요.1
작가와 독자의 감성 연령이 맞을 때, 비로소 작품에는 의미가 있습니다.2
20세기에 때로는 유치한 문장과 질풍 같은 연애를 그리는 다카무라 가오루가 지금의 저에겐 맞습니다.
책의 도입부분 한동안 호흡이 맞지 않아 괴로웠던 건 사실인데(작품의 미숙함과 출판사에 대한 불신과 번역이 가진 한계성과 비뚤어진 마음의 복합적 요소 탓) 어느 순간 '다카무라 가오루다, 이거다'하고 번쩍 다가왔습니다.
다카무라 여사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고독하며 사실 그 안은 유약한, 그런데도 청량감 있는 인물이 많습니다. 사생활에 절조란 건 찾아볼 수도 없는데, 어딘가 투명한 그 느낌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합니다.
코다3는 주인공답게(?) 어딘가 절조가 없는 부분이, 주변 사람을 호모의 나락으로 빠트리는 그런 것들이 좋습니다. 모모와 코다가 물론 좋지만, 전 사실 코다와 하루키의 관계도 좋았습니다.4
이 미묘한 욕망은 뭘까. 에로스의 기준이란 건 개개인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카무라 여사의 이 술에 취한 것 같은 한 없이 몽롱하고 애매한 문장이, 저는 그녀의 에로스라고 생각합니다.(혹은 제가 그녀에게서 느끼는, '나의' 에로스인지도 모르죠) 결국은 사실적인 묘사는 쏙 빠진, 70년대 영화의 괜히 보여주는 모닥불 같은 그런 서술들이 제 감성에 척척 들러붙고, 제가 늘 추구하는 에로스에 마구 직격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의 에로스로 타인을 진동하게 하는 힘이야말로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도 해봅니다. 이 사람은 결국 글쟁이가 될 수밖엔 없었다는 질투와 욕망이, 또 저에겐 있습니다.
과장을 섞자면, 코다가 쌍안경 너머의 모모를 좇으며 모모의 '흥분과 욕정에 빨려 들어갔'(-p.89)던 것처럼, 저는 다카무라 가오루의 20세기 소설에 빨려 들어갈 운명이었습니다.(웃음)
언제나처럼 주인공들이 냄새는 풍기기야 했지만, 소설 안에서 직접적으로 두 사람이 그런 관계라는 걸 인정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 부분은 조금 놀랐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애는 너무나 조용하고, 일상적이며, 남성적인 욕망은 느끼기 힘듭니다. 결코 격정적이지 않는, 그렇지만 "모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도 살아갈 수 없어."(-p.290) 이런 말을 하게 하는 그런 연애입니다.
하드커버판 <마크스의 산>의 마지막 부분을 울다가 이어서 못 봤던 그 심정으로 마지막 4부를 읽었습니다. 데뷔작다운 매끄럽지 않은 구석이 남아있는 소설이지만, 21세기의 다카무라 가오루에게선 느끼기 힘들어진 그런 질풍노도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모모. 걱정 마. 날 믿어. -p.302
Footnote.
- 다카무라 가오루의 연령을 생각하면, 작풍이 바뀌는 것도 당연하단 생각을 합니다. 지금의 다카무라 가오루에겐, 지금의 그 건조하고 고독한 문장이 어울립니다. [Back]
- 나는 작가의 감성 연령은 실제 연령보다 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Back]
- 번역은 고다로 되어 있으나, 다른 고다와 헷갈리므로 여기선 코다로 씁니다 [Back]
- "돌았군." 하루키가 웃으며 고다의 옷 속으로 차가운 손을 집어넣었다. 쌀알만 한 젖꼭지를 찾아내더니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킥킥 웃었다. 아득한 햇빛이 눈 덮인 들판을 비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키의 물건은 이미 딱딱해진 상태였지만, 이윽고 그것이 분출되어 흐르고 스며들어가는 사막에 누워있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자 고다는 또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골목에 쌓인 눈을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다는 감격에 눈물을 흘렸던 때의 그 짧은 꿈만 같았다. - p.196 [Back]




따지고 보면 노골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데도 어쩐지 기억속에는 에로틱하다고 남게되는,
그런 느낌의 문장들이 가득.그게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쩐지 부끄럽지만,정말로 좋았어:D
코다X하루키가 아니었던가.흑흑ㅠㅠ
고다는 合田(ごうだ)고, 여기는 幸田(こうだ)인데, 맞춤법상 두 사람이 같은 이름이 되어버렸음ㆀ
덕분에 리오우보다 하라구치씨가 더 좋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 말입니다~.
왠지 부끄부끄한 것이 마구 읽어보고 싶게 만듭니다ㅎㅎ.
저도 마음 맞는 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카무라 여사 책이 빨리 많이 나와서 팬이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흑.